책소개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는 중국 당대 대종(代宗)의 대력 연간(766∼779)에 활동한 열 명의 시인을 가리킨다. 대종 때는 당나라의 전성기가 안사의 난(755∼762)으로 갑자기 마감되면서 전란의 흔적이 깊이 남은 때로, 시단에서는 왕유, 이백, 고적, 잠삼, 두보 등 대시인들도 차례로 사라진 이후다. 이러한 시단에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곧 전기(錢起), 노윤(盧綸), 이단(李端), 한굉(韓翃), 사공서(司空曙), 경위(耿湋), 최동(崔峒), 길중부(吉中孚), 묘발(苗發), 하후심(夏侯審) 등이다. 일부는 전부터 장안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일부는 지방에서 장안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안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이름이 알려졌기에 당시 ‘대력십재자’란 칭호가 만들어졌다.
시인들이 많이 다룬 제재는 산수전원(山水田園)이다. 멀리로는 남조의 사조(謝朓)의 유풍을 이었으며, 가까이로는 왕유(王維)를 종주로 삼아 산수전원시의 풍격을 계승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성당 산수시를 계승했지만 성당 산수시에서 보이는 명랑하고 혼융(渾融)한 대자연 묘사에 비해 유심(幽深)하고 정밀(靜謐)한 감각이 두드러지고 세부적인 묘사가 증가했다.
성당시에는 비록 산수시라 하더라도 신선하고 동적이었으며 때로 드넓은 광경을 배경으로 웅혼한 기상이 깃들었지만, 대력십재자는 정태적인 모습을 그리는 데 주력하면서 외관의 묘사에 치중했다. 또 당시에는 불교와 도교가 성행해 산수를 빌려 청정하고 담박한 생활에 대한 정취를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생의 정취와 심미적 이상이 맞아떨어진 세계를 발견한 시인들은 한적한 산수를 찾아 맑고 유현한 심경과 내심의 고적을 노래했다. 그들의 시가 청공(淸空)하고 적정(寂靜)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력십재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형식적인 측면에 공력을 들인다는 점이다. 그들이 오언율시를 많이 지은 데 반해 악부(樂府)나 가행체(歌行體) 등 고시(古詩)는 거의 없는 데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언어는 우미하고 음률은 조화로우며, 격률은 엄정하고 자구는 짜임새가 있는 것이 이들 작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이미지는 비록 주위 환경과 생활 중에 자주 보는 것이나 묘사가 세밀하고 각화(刻畵)가 핍진하다. 하나의 연(聯), 또는 두 개의 연에서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아름다운 시경(詩境)을 찾기는 쉽다. 뛰어난 구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대구(對句)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시를 전체적으로 조망했을 때, 송대 엄우(嚴羽)의 시체(詩體)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대력 시인들은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대력체(大曆體)’는 장열, 장구령, 맹호연, 왕유, 고적, 잠삼, 이백, 두보가 활동한 개원(開元, 713∼741)과 천보(天寶, 742∼756) 사이의 ‘성당체(盛唐體)’와 한유, 맹교, 백거이, 원진, 유우석, 유종원 등이 활동한 원화(元和, 806∼820)의 ‘원화체(元和體)’ 사이에 놓인 셈이다. 다시 말해 ‘대력체(大曆體)’는 고조기의 여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음에 오는 두 번째 고조기의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시의 전체를 조망했을 때, 대력체는 비록 성당체의 여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당체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되는 시작이기도 하다. 성당시기까지는 중국 고전시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유로(流露)를 중시했고 학식보다 천분을 중시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낸 시인이 이백(李白)이었다. 이에 비해 대력 연간 이후에는 학식과 조탁을 중시했으며 후천적인 노력을 중시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준 시인은 대력 연간 초기까지 활동한 두보(杜甫)였으며, 대력십재자는 이러한 흐름을 바로 계승했다. 그러므로 두보 이후의 모든 시인은 두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중대한 전환점이 대력 연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력십재자의 시는 중국 고전시의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력십재자의 시는 짧게는 성당시의 여운을 가진 변주로 볼 수도 있고, 길게는 중국 고전시 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다. 두 높은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대력십재자의 작품을 통해 변화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면, 중국 고전시의 요점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력십재자의 현존하는 시 작품은 약 1400수가 된다. 본 시집은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골랐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최전성기의 당나라, 그 화려한 문물 속에서 자란 세대. 그러나 갑작스런 전란과 그로 인한 국가의 쇠망으로 강렬한 정신적 낙인을 갖게 된 세대. 이들은 성당의 드높은 기개와 혼융한 시 세계에서 내려와 개인의 심리적 균형을 잡는 데 몰두한다. 대력 연간(766∼779)에 활동한 열 사람의 탁월한 시인, 바로 대력십재자다. 이백과 두보의 성당체를 이어받아 한유, 백거이의 원화체에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 대력십재자의 시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지은이
전기(錢起)
전기(錢起, 720?∼783?)는 자가 중문(仲文)이며 오흥[吳興,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후저우(湖州)] 사람이다. 750년 <상령의 슬 연주(湘靈鼓瑟)>라는 제목의 시험에서 진사로 급제했다. 비서성 교서랑(校書郎), 남전위(藍田尉),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郞),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 고공낭중(考功郞中) 등을 역임했다.
전기는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일찍이 왕유(王維)와 수창(酬唱)했고, 유장경(劉長卿)과 함께 이름이 높았으며, 낭사원(郎士元)과 ‘전랑(錢郞)’으로 병칭되었다. 특히 전별시(餞別詩)에 뛰어나 대력 연간에 공경(公卿)이 장안을 떠날 때는 그의 시가 빠지지 않았다. 동시대인 고중무(高仲武)가 편찬한 ≪중흥간기집(中興間氣集)≫에선 그의 시가 맨 앞에 실렸다. 그는 진지하게 시작을 해 청려(淸麗)하고 풍격이 높은 시를 지었는데 특히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뛰어났으며 사경(寫景)에 능했다. 한편 그는 지나치게 언어의 수식과 음률을 중시하다 보니 깊은 감정이나 내용 면에서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성당시(盛唐詩)가 발전시킨 의경과 풍격 쪽으로 나아갔지만, 혼융(渾融)한 맛이 적어 성당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 ≪전고공집(錢考功集)≫ 10권이 전한다.
노윤(盧綸)
노윤(盧綸, 748∼799?)은 자가 윤언(允言)이고 포주[蒲州,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어 외가 위씨(韋氏) 집에서 자랐으며,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파양(鄱陽)으로 피난 가서 살았다. 대력 연간 초기에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771년 재상 원재(元載)가 그의 문필을 인정하면서 추천해 문향위(閿鄕尉)가 되었다. 다음 해 밀현령(密縣令)이 되었으며 773년 섬부 호조(陜府戶曹)가 되었다. 774년 경에 재상 왕진(王縉)의 추천으로 집현전학사 및 비서성 교서랑이 되었으나 곧 병으로 그만두었다. 이후 주로 장안과 낙양에서 지내다가 780년 소응령(昭應令)이 되었다. 785년 하중동섬괵행영부원수(河中同陝虢行營副元帥) 혼감(渾瑊) 아래에서 판관(判官)이 되었다. 만년에 덕종(德宗)의 부름을 받아 창화한 후 호부낭중(戶部郞中)에 이르렀다.
노윤은 대종(代宗)과 덕종(德宗) 연간에 시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사후 헌종(憲宗)이 사람을 보내 유작을 찾도록 했으며, 문종(文宗) 역시 노윤의 시를 좋아해 그 후손에게 시문을 진상하게 해 500수를 얻었다. 대력십재자 가운데 연배가 낮은 편이나 시는 다른 시인보다 남성적이다. 송별시와 응수시가 많으나 아름다운 서경시와 변새시도 있다. 수려한 점도 있으나 종종 속조(俗調)에 빠지기도 한다. 그의 시를 통해 대력 시풍(大曆詩風)이 정원(貞元) 연간에 어떻게 변모했는지 알 수 있다. ≪신당서≫에 ≪노윤시집(盧綸詩集)≫ 10권이 저록되어 있으며, 현재 ≪노호부시집(盧戶部詩集)≫ 10권이 전한다.
이단(李端)
이단(李端, ?∼785?)은 자가 정기(正己)이며, 조군[趙郡, 허베이성 자오현(趙縣)] 사람이다. 어려서 여산(廬山)과 숭산(嵩山) 등지에서 수학했다. 전기, 노윤 등과 친했으며, 이들과 함께 부마 곽애(郭曖)의 집에 출입했다. 당시 이들 시인들과 함께 창화하며 시명이 높아 767년(대력 2년)을 전후해서 이들을 통칭하는 ‘대력십재자’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770년에 과거에 급제해 비서성 교서랑이 되었다. 이후 주로 장안에서 활동했으며 만년에 병으로 강남에 가 항주사마(杭州司馬)가 되었다. 그의 시문과 관련 자료로 보아 형산(衡山)과 촉(蜀) 지방에 간 적도 있는데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현존하는 시는 ≪전당시≫에 3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한굉(韓翃)
한굉(韓翃, ?∼783?)은 자가 군평(君平)이며 남양[南陽, 허난성(河南省)] 사람이다. 754년 진사. 762년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후희일(侯希逸)의 막부에서 장서기(掌書記)가 되었으며, 3년 후 후희일이 방축되자 장안으로 가 한거했다. 이후 전기, 노윤 등과 창화하면서 부마 곽애의 저택에 드나들며 대력십재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후 활주(滑州)나 변주(汴州)의 막부에서 일했다. 780년 덕종이 그가 지은 <한식(寒食)>을 높이 평가해 가부낭중(駕部郞中) 및 황제의 조칙을 기초하는 지제고(知制誥)로 발탁했고, 다음 해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대력십재자 가운데 한굉은 비교적 잘 알려졌는데 이는 그의 시가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전기(傳奇)소설 <유씨전(柳氏傳)>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중무(高仲武)는 ‘흥치가 풍부하다(興致繁富)’고 평했으며, 청대 왕사정(王士禎)은 칠언절구가 함축적이라고 평했다. 청대 옹방강(翁方綱) 역시 왕유(王維)의 풍치(風致)에 가깝다고 했다. 한굉의 시는 짜임새가 있고 청려하며 서경시와 송별시가 많다. 송별시는 당대 시가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은 장르로, 이별의 심경을 떠나는 사람의 행정(行程)과 경물 속에 묘사하기에 서정보다는 서경이 많은데, 이러한 기법은 한굉에게서 가장 완숙하게 완성되었다. 특히 가볍고 빠른 행정으로 상대방의 여행의 순조로움을 기원하는 묘사가 많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어휘와 기교에 주목해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를 많이 남겼다. 현존하는 시는 ≪전당시≫에 3권으로 묶여 있다.
사공서(司空曙)
사공서(司空曙, ?∼789)는 자가 문초(文初) 또는 문명(文明)이며 광평[廣平, 허베이성 용녠(永年)] 사람이다. 안사의 난 때 강남으로 피난 갔으며, 대력 연간 초기에 과거에 급제한 후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사공서는 이 시기에 노윤, 전기 등과 시문을 창화하며 ‘대력십재자’의 한 사람으로 장안에 이름이 높았다. 778년경 강릉부(江陵府) 장림현승(長林縣丞)으로 좌천되었으며 788년 검남서천절도사 위고(韋皐)의 막부에 들어가 검교수부낭중(檢校水部郎中)이 되었다. 다음 해 우부낭중(虞部郞中)이 되었지만 곧 죽었다. 명대 호진형(胡震亨)은 그의 시가 ‘완아한담(婉雅閑淡)’하다고 평했다. 현존하는 시는 ≪전당시≫에 2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경위(耿湋)
경위(耿湋, 733?∼787?)는 포주[蒲州,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 사람으로, 763년 과거에 급제해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되었다. 전기, 노윤 등과 함께 부마 곽애의 집에 출입했으며, 당시 이들 시인들과 창화하며 시명이 높아 767년(대력 2년) 전후해 이들을 통칭하는 ‘대력십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773년 좌습유가 되었으며, 774년 충괄도서사(充括圖書使)로 회남과 강남 지역의 서책을 수집하면서 안진경(顔眞卿), 유장경(劉長卿), 엄유(嚴維), 진계(秦系) 등 현지 명사들과 창화했다. 781년 허주사법참군(許州司法參軍)으로 좌천되었다. 근체시가 많고, 그 내용은 송별과 수창(酬唱), 가난과 노년에 대한 탄식이 많다. ≪신당서≫에 ≪경위시집(耿湋詩集)≫ 2권이 저록되어 있고, 현재 ≪전당시≫에 2권으로 묶여 있다.
최동(崔峒)
최동(崔峒, ?∼786?)은 정주(定州) 박릉군[博陵郡, 허베이성 딩현(定縣)] 사람이다. 안사의 난 때 강남으로 피난 갔다. 대력 연간 초기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대력십재자의 한 사람으로 전기와 노윤 등과 창화했다. 습유, 집현전학사를 거쳐 좌보궐(左補闕)이 되었다. 노주(潞州) 공조참군(功曹參軍)으로 좌천된 후 임지에서 죽었다. 고중무(高仲武)는 “문장이 화려하고 빛나며, 주제가 방정하고 문아하다(文彩炳然, 意思方雅)”고 평했다. 유작은 현재 ≪전당시≫에 1권으로 묶여 있다.
길중부(吉中孚)
길중부(吉中孚)는 초주(楚州) 사람으로, 원래 도사(道士)였다가 대력 연간 초기에 환속해 교서랑으로 징초되었다. 전기, 노윤 등과 부마 곽애의 저택에서 놀았다. 773년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에 급제했다. 이후 만년현위(萬年縣尉), 사봉낭중(司封郞中), 지제고(知制誥), 한림학사,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했으며 노부시랑(盧部侍郞) 등을 거쳐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이르렀다. 노윤이 그의 시를 가리켜 ‘새로 지은 시가 장안에 널리 퍼지고(新詩滿帝鄕)’라 칭송했다. ≪신당서≫에 ≪길중부시≫ 1권이 저록되어 있으나 전하지 않으며, 현재 시 한 수가 전한다.
묘발(苗發)
묘발(苗發, ?∼786?)은 노주(潞州) 호관[壺關, 산시성(山西省)] 사람으로, 숙종 때 재상을 지냈던 묘진경(苗晉卿)의 아들이다. 처음에 악평현령(樂平縣令)이 되었으며, 비서승(秘書丞),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郞), 병부원외랑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 두 수가 전한다.
하후심(夏侯審)
하후심(夏侯審)은 중당 시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대력십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력 연간 초에 지방의 참군을 지냈으며 강동을 유람했다. 장안에 들어가 전기, 노윤, 위응물, 사공서 등과 창화했고 부마 곽애의 저택을 드나들었다. 780년에 군모월중과(軍謀越衆科)에 급제해 교서랑에 제수받은 이후 영국현승(寧國縣丞), 시어사(侍御史), 주객원외랑, 사부낭중(祠部郞中) 등을 역임했다. 이가우(李嘉祐)는 그를 칭해 “소매에는 아름다운 시구가 많고(袖中多麗句)”라고 했다. 현재는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옮긴이
서성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북경대학 중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현재 열린사이버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펴낸 책으로는 <양한시집>, <한 권으로 읽는 정통 중국문화>, <중국문학의 즐거움>(공저), <삼국지, 그림으로 만나다> 등이 있고, <그림 속의 그림>, <대력십재자 시선> 등을 번역하였다.
차례
전기(錢起)
남전 시내에서 어부의 집에 묵으며 藍田溪與漁者宿 3
옥산 촌로의 벽에 적다 題玉山村叟壁 6
배적의 남문에서 가을밤 달을 마주하고 裴迪南門秋夜對月 9
왕유의 ‘봄밤에 죽정에서 이별하며 주다’라는 시에 답하며 酬王維春夜竹亭贈別 11
산중에서 양 보궐의 방문을 받고 山中酬楊補闕見訪 13
상령의 슬 연주 湘靈鼓瑟 16
동으로 가는 하후심 교서랑을 보내며 送夏侯審校書東歸 20
신라에 사신으로 가는 육정 시어를 보내며 送陸珽侍御使新羅 23
신라에 사신으로 가는 육 시어를 다시 보내며 重送陸侍御使新羅 25
일본으로 돌아가는 스님을 보내며 送僧歸日本 28
늦봄에 옛 산의 초당에 돌아와 暮春歸故山草堂 30
가을밤 양양으로 돌아가는 조열을 보내며 秋夜送趙冽歸襄陽 32
협객을 만나 逢俠者 34
강행 무제 江行無題 36
물고기를 문 물총새 銜魚翠鳥 38
노윤(盧綸)
음력 12월 8일 함녕왕의 부하 사륵이 호랑이를 잡는 것을 보고 지은 노래 臘日觀咸寧王部曲娑勒擒虎歌 43
변방으로 돌아가는 한 도호를 보내며 送韓都護歸邊 48
종군의 노래 從軍行 50
이단을 보내며 送李端 53
장안의 봄 조망 長安春望 55
저녁에 악주에 묵으며 晩次鄂州 57
지덕 연간에 도중에서 본 일을 쓰고, 돌아가 이간에게 부침 至德中途中書事, 却寄李? 60
밤에 풍덕사에 투숙하며 액 상인을 뵙고 夜投德寺謁液上人 62
창당의 ‘숭악에서 마 도사를 찾으며’를 받고 답하며 酬暢當尋嵩岳麻道士見寄 65
새하곡 제1수 塞下曲其一 69
새하곡 제2수 塞下曲其二 71
새하곡 제3수 塞下曲其三 73
새하곡 제4수 塞下曲其四 75
이 과의에게 贈李果毅 77
이단(李端)
고별리 古別離 81
무성 蕪城 84
길중부의 환속 소식을 듣고 이 시를 지어 주다 聞吉中孚還俗, 因而有此贈 87
회수의 포구에서 묵으며 사공서를 그리다 宿淮浦憶司空文明 89
신라에 사신으로 가는 귀 중승을 보내며 送歸中丞使新羅 91
고쟁 소리 들으며 聽箏 94
새 보름달에 제사하며 拜新月 96
계곡을 걷다가 비를 만나 유중용에게 부침 溪行逢雨, 寄柳中庸 98
한굉
매화락 梅花落 103
상원으로 돌아가는 냉조양을 보내며 送冷朝陽還上元 105
수양으로 가는 진 녹사를 보내며 送壽川陳錄事 108
선유관에 함께 적다 同題仙遊觀 110
천복사 형악선사 방에 적다 題薦福寺衡岳禪師房 112
한식 寒食 114
악주로 가는 나그네를 보내며 送客之鄂州 117
사공서(司空曙)
장안의 새벽 조망 – 정 보궐에게 부침 長安曉望寄程補闕 121
운양관에서 한신과 밤새운 후 헤어지며 雲陽館與韓紳宿別 123
사촌 동생 노윤이 찾아와 자고 감을 기뻐하며 喜外弟盧綸訪宿 125
교서랑 이단의 작품을 받고 답하며 酬李端校書見贈 127
영남으로 폄적되는 정 명부를 보내며 送鄭明府貶嶺南 129
반란이 평정된 후, 북으로 가는 사람을 보내며 賊平後送人北歸 131
황폐해진 보경사를 지나며 經廢寶慶寺 133
강촌에서 보이는 대로 江村卽事 135
협곡 어구에서 친구를 보내며 峽口送友 137
노진경을 보내며 送盧秦卿 139
경위
신라에 사신으로 가는 귀 중승을 보내며 送歸中丞使新羅 143
봄날 보이는 대로 春日卽事 146
배 행군 중승께 올림 上裴行軍中丞 148
가을날 秋日 150
최동
숭복사 선원에 적다 題崇福寺禪師院 155
동료 이 명부에게 贈同官李明府 157
길중부(吉中孚)
신라에 책립과 조문 사신으로 가는 귀 중승을 보내며 送歸中丞使新羅冊立弔祭 161
묘발(苗發)
소주로 가는 사공서를 보내며 送司空曙之蘇州 167
벼슬을 그만두고 검주로 가는 손덕유를 보내며 送孫德諭罷官往黔州 169
하후심(夏侯審)
이불 속의 수놓인 신발을 읊다 詠被中繡鞋 174
해설 177
지은이에 대해 186
옮긴이에 대해 195
책속으로
잘도 타는구나, 운화산의 슬(瑟)
언제나 들었었지, 상부인(湘夫人)이 뜯던 음악
일찍이 강가의 하백은 저도 모르게 춤추었다지만
초 지방으로 유배 온 사람은 차마 듣기 힘들었다지
애절한 곡조는 종과 경쇠보다 더 처절하고
맑고 높은 음조는 아득히 하늘 끝까지 퍼져 간다
창오산의 순임금도 와서 애타게 원망하고
구릿대 향초도 음악 듣고 더 짙은 향 뿜어내네
음악은 강물처럼 상수(湘水)의 포구까지 흘러가고
가락은 바람 되어 아득히 동정호를 지나간다
곡은 끝났어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강물 위로 떠 있는 몇 점의 푸른 봉우리